[충남동부보훈지청] 승전고를 울린 마지막 기병대장

2020-06-03     뉴스밴드(편집부)
보상과장 김언태

192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나 1944년 일본 주오(中央)대학교 법학과 재학 중 일본군 학도병으로 끌려가 중국 전선에 투입되었으나, 일본군의 일원으로 싸워야 하는 치욕감을 견디지 못해 2번의 탈출을 시도한 끝에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망명하였다.

자신의 일생을 조국의 독립에 바치기로 결심하고 본명 김병원(金秉元)을 장철부(張哲夫)로 개명하였다.

이 후 한국광복군에 입대해 제1지대 제1구대 유격대장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군사방면에서 독립운동을 체계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김구 선생의 추천으로 중국 황포군관학교 기병과에 입교하여 졸업하였다.

귀국 후 1948년 육군사관학교 5기로 임관한 그는 계속 학교에 남아 중대장, 전술학 교관 등을 지냈으며, 독립기갑연대 창설과 함께 기병대대장으로 근무하다가 6‧25전쟁을 맞게 되었다.

당시 장철부 소령의 기병대대는 경기도 의정부로 출동해 수색작전을 전개한 후 한강 이남으로 철수해 진지를 구축하였고, 6월 29일 한강을 도하하는 북한군 수백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또한, 7월 11일에는 충남 공주에서 북한군 제6사단 1개 대대를 섬멸하는 등 각종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8월 4일 경북 청송지구에서 청송-경주로 진출하려는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다 중상을 입고도 최후까지 총격전을 벌였으나, 대대 지휘소가 점령되기 직전“포로가 되는 수치를 당하느니 죽음을 택하겠다”라며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고 29년의 삶을 마감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전공을 기려 중령으로 1계급 특진을 추서했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2002년에는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