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역사를 보면 경영이 보인다 3
경영의 神, 마쓰시타 고노스케 上
2009-06-01 이요섭
내셔널 그룹의 창업주인 마쓰시타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가장 존경받는 경영인 중 한 사람이다. 일본인들은 그를 ‘경영의 신’이라고 부른다. 초등학교도 못나온 그를 그렇게 부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마쓰시타는 와카야마에서 3남5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원래 유복한 집안이었으나 그가 여섯 살 되던 해, 집안이 몰락하고 말았다.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고 했는데 그의 집안은 당장 먹을 것이 없을 정도로 폭삭 망하고 말았다.
온 식구가 굶어죽을 지경이 되자 부모는 9살밖에 되지 않은 마쓰시타를 남의 집 보모로 집어넣었다. 마쓰시타는 낯선 집으로 들어가 혹독한 시련을 겪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일어나서 넓은 마루를 물걸레질을 한 다음, 주인집 아기를 하루 종일 업어 길러야 했다. 그밖에 온갖 잔심부름을 하다가 밤 11시가 되어서야 겨우 차가운 마룻바닥에서 잠을 자야 하는 일과가 계속되었다.
갖은 핍박과 고통으로 시달리던 마쓰시타는 12살이 되어서야 자전거포 점원이 되어 그 집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는 날아갈듯이 기뻤다.
당시 자전거는 생활용품이 아닌 레저용으로 외국에서 수입되던 때였다. 자전거 한 대 값이 일반 직장인의 월급, 일 년치를 모아야 살 수 있을 정도의 고가였다.
마쓰시타는 저잣거리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서 가게 앞에 물을 뿌리고 깨끗하게 청소를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으면 누구를 막론하고 항상 밝은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비가 오나 눈이오나 항상 변함이 없는 그를 많은 사람들이 칭찬했다.
와카야마에 계신 부모님과 형제들이 보고 싶기도 했고 다른 아이들처럼 놀고 싶기도 했지만 꾹 참고 견뎌냈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지금 배가 고프다고 씨앗용 곡식을 먹어버리면 나의 미래는 없을 것이다. 지금의 어려움을 참고 견디면 언젠가는 풍족하게 살아갈 날이 다가오리라’ 외롭고 힘들 때마다 마쓰시타는 스스로를 향해 그렇게 소리쳤다.
17살이 되자 마쓰시타는 전등을 제조하는 회사에 입사할 기회를 얻었다. 그런데 입사를 약속했던 회사가 경영악화를 핑계로 마쓰시타의 입사를 거절했다.
이미 자전거포에서 나온 그는 하는 수 없이 친구가 일하던 시멘트 하역회사의 임시직으로 입사했다. 그런데 그 일은 너무 힘들고 위험한 일이었다. 그의 어깨는 매일 피멍이 들었고 시멘트 운반선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익사직전에 빠지기도 했다.
다행히 6개월 뒤 전등을 제조하는 회사에 입사할 수 있었다. 그는 새로운 각오로 이전보다 더 열심히 일을 했다. 어떤 일을 하든지 시멘트 운반선에서의 작업보다 더 힘들고 위험하진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23살이 되던 해, 마쓰시타는 그간 착실하게 배운 기술을 토대로 조그만 공장을 차렸다. 비록 철공소 수준의 작은 임대공장이었지만 처음으로 자기 공장을 갖게 되었다는 기쁨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고통뿐이었다. 아직 어린 그를 믿지 못한 사람들이 도통 일거리를 주지 않았을 뿐더러 어쩌다가 만든 제품도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사업이 점점 부진해지자 견디지 못한 종업원들이 그의 곁을 떠나갔다.
그는 부인과 단 둘이 공장에서 먹고 자며 기술 개발과 판매에 매달렸다. 동시에 오사카 시내의 전기상을 찾아다니며 상품을 진열해달라고 매달렸다. 그러나 매출은 여전히 전무한 상태였다.
마쓰시타의 부인은 돈을 마련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친정에서 돈을 융통해오던 것도 그나마 막히게 되자 나중에는 집안에 있는 옷을 전당포에 맡겨 급전을 마련하기도 했다.
몸도 마음도 지쳐서 더 이상은 버틸 수 없을 지경이 되었을 무렵 그의 열정과 끈기에 감동한 전기상들이 그가 개발해낸 제품을 취급해주기 시작했다.(下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