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서부보훈지청] 충의사 앞 메타세콰이어길을 걸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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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서부보훈지청] 충의사 앞 메타세콰이어길을 걸으면서
  • 충남서부보훈지청 보훈과 김용운 주무관
  • 승인 2024.04.23 18: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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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은 주무관
김용은 주무관

윤봉길의사는 나라에 명운이 충분하게 기운 1908년에 태어났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된 시기인 을사조약이 1905년이니 외교권이 박탈당했다는 울분이 식고 슬픔과 허탈감이 더 커져가는 더할나위없이 을씨년스러운 시기에 태어난 것이다.

윤봉길 의사의 첫 번째 활동은 애국계몽운동이었다. 실력이 없으니 나라를 빼앗긴 것이라면 실력을 기른다면 나라를 다시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자력갱생의 생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대표적 친일단체인 일진회에 반대되는 월진회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문맹퇴치, 축산장려, 야학, 독서회운영 등의 활동을 벌이며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후 윤봉길 의사는 독립운동을 위해 우리나라를 떠나 중국으로 향하게 된다. 한 사내의 인생이 나무와 같다면 그 당시의 상황은 잎이 지는 것과도 같았을 것이다. 아무리 잎이 파릇파릇하고 푸르러도 차가운 갈바람을 버틸 수 없었고 결국 천천히 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잎이 진다고 나무가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중국으로 떠나면서도 그의 기백과 영혼은 곧게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윤봉길 의사는 상해임시정부에 합류하게 된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보면 일제는 상하이사변을 일으켰고 제국주의의 기세가 등등하던 때였다. 그와 반대로 당시 독립운동의 방법이었던 무장투쟁, 외교 여론전, 실력양성 모든 방면에서 부진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할 목적으로 임시정부에서 의거를 기획하게 된 것이다. 1930년대는 독립운동가에는 굉장히 어려운 시기였다. 물론 독립운동은 1분 1초도 쉬운 시기가 없었다. 그러나 30년대는 식민지 조선으로 대략 20년 이상 지난 시점이었고 일제는 더없이 강성하던 때였다.

국권침탈 이후 태어나서 일제의 식민지에서만 자란 사람들이 성인이 되어가던 때였다. 독립운동의 열의가 10년대, 20년대만큼 있기 어려운 시기로 점점 접어들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국내적으로는 3.1운동과 같은 거국적 독립운동은 이전보다 일어나기 어려워지던 시기였고

국외에서 이루어지는 여론전은 외국 열강이 보기에는 조선이라는 일제의 식민지는 큰문제없이 굴러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며 무장독립운동은 이제 만주까지 마수를 뻗은 일제에 의해서 이전과 같은 활동을 어려워진 때였다. 그런 시기에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아직 한민족에게는 독립의 의지가 있다는 걸 전세계에 알리게 되었다.

충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생가를 둘러보며 나는 윤봉길 의사의 마지막을 생각했다. 접선장소에서 자동차를 타고 도시락폭탄과 물병폭탄을 확인하고 거사장소인 홍커우 공원으로 향하며 차 안에서 잠시동안 눈을 감고 생각에 빠졌을 것이다.

우선은 자신이 나고자란 고향인 예산군을 떠올리며 가족에 대해서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거사의 성공을 바랐을 것이다. 당시 열악했던 독립운동 상황상 폭탄의 화력이 부족하거나 불발이 되는 경우도 있으니 의사는 아마 자신의 안위보다도 그런 점을 더 걱정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혹여나 전승행사장의 경비가 삼엄하여 폭탄을 던지기 전에 들킬 수 있다는 불안한 생각 또한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다음으로는 거사가 성공하게 되면 생기게 될 일들 생각했을 것이다. 한민족의 독립의 의지를 세계에 알릴 수 있다는 것과 지금도 식민지로 고통받고 있을 한반도에 있을 동포들에 대한 생각 마지막으로 자신의 마지막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을까? 즉결심판 혹은 지루한 재판과정도 약간 생각하며 그는 상하이 홍커우 광장에 도착했을 것이다.

윤봉길 의사의 마지막을 생각하며 나는 겨울철 메타세콰이어 나무를 상상했다. 잎이 지고 앙상한 모습이지만 하늘로 향해 곧게 뻗은 모습. 그리고 그 주위로 새하얀 눈이 상복처럼 쌓여 있고 내 입에선 새하얀 입김이 향처럼 피어 날 것이다. 사계절 동안 메타세콰이어는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늘 그 모습이 아니다.

하지만 높고 길게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 모습만큼은 변함이 없다. 충의사를 봄에 방문했을 때는 한적하고 날씨 또한 좋아서 모든 게 생명력 넘치고 있었다. 계절이 바뀌는 가을이나 겨울에 오게 되어도 윤봉길의사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두려움을 이긴 용기있는 활동을 기억하고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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